아리스토텔레스의 비평론에서 중요한 개념이 하나 남아있다. 바로 카타르시스katharsis란 개념이다. 카타르시스란 감정의 배설을 의미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 비평 이론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개념이다.
카타르시스에 대한 정확한 정의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보통 '감정의 배설', 특히 관객들이 공포와 연민에 의해 긴장돼있다가 극의 종료와 더불어 모든 긴장이 풀리면서 발생하는 쾌감으로 정의된다.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위해서 극 중 플롯은 관객들이 사건에 깊이 몰입하게 만들었다가 절정을 지나서는 모든 사건이 해결되게 만들어 관객들을 공포와 연민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앞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롯의 구조가 중요하다고 강조한 이유도 카타르시스의 발생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카타르시스는 『시학』에서 단 한차례 등장하지만 수세기에 걸쳐 번역가들과 주석가들이 카타르시스에 관한 이론을 완성하려 노력했다. 현재는 이를 감정의 배설로 볼 것인지 정화로 볼 것인지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남아있다.
전통적으로 버처(S.H. Butcher)와 같은 철학자들은 카타르시스를 감정의 배설로 해석했다. 그래서 시학 6장을 “연민과 공포를 통해 이러한 감정의 적절한 배설을 가져온다”(di' eleou kai phobou perainousa ten ton toiouton pathematon katharsin.)고 번역한다. Katharsin은 의학적 은유로서 정신적으로 유해한 감정을 배출한다는 뜻이라 추정한 것이다. 반면에 카타르시스를 정화로 해석한 엘스(Gerald F. Else) 교수는 이 문장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연민과 공포를 담고 있는 사건의 과정을 통해 그러한 성질을 지닌 저 고통스럽거나 운명적인 행위를 정화시킨다” 그렇다면 엘스는 배설을 일종의 정화로 읽고 있으며, 그것은 감상자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극중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두번째 해석을 채택한다면 비극이 어떻게 정화되는지 구조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플롯에서 비극이라 불리는 사건은 애정으로 묶인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고통스런 행위들이다.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살해한 것처럼 태고부터 금기로 내려온 것들이다. 이러한 행위를 벌인 당사자들은 반드시 정화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당사자들이 정말 악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어떤 중대한 사실을 전혀 몰랐고, 가족을 살해할 의도가 없던 상태에서 자행됐어야 한다. 실제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악인으로 규정해 살해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진지한 실수’로 인해 충격을 받은 뒤에야 감상자들은 주인공을 동정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사악한 행위는 정화되는 것이다.
비어슬리는 감정을 배설로 보는 전통적 관점에도 귀를 기울인다. 그로 인해 플라톤의 시인 반대론에 반박할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비극은 시민의 감정을 자극해 그들 영혼의 평정과 조화를 흔들어놓는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들어보면 비극을 본다고 해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관객들이 비극을 보고 순간적으로는 감정의 흥분을 겪지만 결국에는 부정적이었던 감정을 전부 배설하여 평정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극을 즐겨보는 시민은 가장 안정되고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비극의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도덕적이지만은 않다. 하지만 오히려 우리와 닮은 평범한 인물이 비극을 겪는 사건을 보면서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더 고양되는 계기를 맞는다. 그래서 극에 대한 도덕적 검열보다는 오히려 미학적 검열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추론해낼 수 있다. 왜냐하면 착한 사람이 불행해지고 나쁜 사람이 잘 되는 비극은 없으며, 나와도 인기를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카타르시스는 생활에서 접했던 영화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영화의 비극적 상황이 주는 공포감과 그로 인해 주인공에게 느끼는 연민을 통해 영화에 더 몰입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부모님이 돼지가 된 상황(비극)에 놓인 치히로, <부산행>에서 딸과 여행을 가다 기차 안에서 좀비(비극)를 만난 석우, 그리고 <다크나이트>에서 조커에 의해 도시가 질서붕괴(비극)에 빠지는 것을 목격하는 브루스 웨인을 생각해보자. 관객들은 이들이 비극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인지 보기 위해 끝까지 영화를 관람한다. 그리고 영화 속 사건이 완전히 매듭지어져 끝났을 때, 비로소 후련함과 함께 영화에서 떠날 수 있게 된다. 카타르시스는 관객을 영화 속 세계에 묶어두는 장치이자 영화와 같은 이야기의 작품성을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 중 하나로도 이용된다.
플라톤은 예술이 지혜로운 사람이 세상에 나타나는 걸 방해한다며 공격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오히려 예술이 지혜로운 사람을 만들 수 있다고 추론했다. 그에 의해 예술은 심리학적이고 인식론적 역할을 새로 주목 받을 수 있었고 이는 사회 속에서 예술의 정당성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후에 고대 그리스 시대가 지나고 헬레니즘과 로마 시대가 찾아왔을 때에도 예술, 특히 서사시나 음악이 인간의 심리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에 관한 논의가 종종 등장하게 된다. 이로써 본격적으로 음악과 서사 예술은 인간 역사와 함께 발을 내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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