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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사 연재] #12. 단순 균제로서 아름다움을 부정한 플로티누스

미학사 연재

by AppyHending 2020. 7. 16.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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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티누스는 고대 그리스 후기 헬리니즘 시대의 철학자다. 암모니우스 삭카스에게서 플라톤 철학을 전해듣고 그 영향을 받아 신플라톤주의자가 된다.

플로티누스는 54편의 수필, 「논구 Tractates」를 썼고 이를 그의 제자 포르피리(Porphyry)가 『에네아데스 Enneads』라는 이름의 책으로 출간한다. 이 안에서 플로티누스는 형이상학 이론을 전개한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가시적 세계 뒤의 궁극적 원천으로서 ‘일자(一者, One, to hen)’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플로티누스의 제1의 근본 원리다. 그러니까 일자는 세계의 궁극적 실재이기 때문에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일자에 의해 만들어지고 유지된다는 것이다. 이 일자는 일체의 관념과 지식을 넘어선 것이다. 다만, 우리가 이나 무한이란 이름으로 부를 뿐이다.

산에서 흘러나오는 상류를 생각해보자. 산꼭대기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여러 방향으로 흘러간다. 또한 물은 흘러나온 산과의 거리에 따라 수질이 달라진다. 마찬가지로 이 세계도 일자에서 흘러나와 존재가 형성됐다. 그런데 일자와 얼마나 가까우냐에 따라 실존의 정도가 달라진다. 영혼은 일자에 가장 가까운 존재지만 질료는 일자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존재다.

일자에 관한 제2,3의 근본원리는 일자에게 각기 다른 역할과 기능을 요구하는 것뿐이다. 2의 근본원리에서 일자는 지성 또는 마음이며 예지신(Divine Knowledge, nous)이다. 그래서 일자는 가지적 세계를 구성하는 플라톤적 형상(혹은 이데아), 가시적 세계의 이상형 혹은 모범이다. 3의 원리에서 일자는 순수영혼 혹은 창조성과 생활의 원리다. 이 세 근본원리가 바로 일자를 구성하고 있으며, 세상의 모든 실재는 이 일자로부터 유출되어 나온다. 그리고 유출된 실재는 다시 일자로 돌아가길 갈망하는 성질을 갖고 있다. 플로티누스는 이를 존재가 샘에서 흘러 넘치는 것이라 비유하며 존재자들은 각자 존재의 빛에 얼마나 가까우냐에 따라 정도의 차이를 갖고 있다. 가장 일자에 가까운 실재가 영혼이며, 가장 멀리 떨어진 상태가 바로 질료이다.

 

이러한 형이상학 체계 속에서 플로티누스는 그의 미학이론을 전개한다. 이는 그의 수필 「논구」 속 「미론 On Beauty」와 「예지적 미에 관하여 On the Intellectual Beauty」의 일부 그리고 「무수한 이데아 형상들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 How the Multiplicity of the Ideal-Forms came into being; and on the Good」에서 잘 드러난다.

플로티누스는 플라톤이 그랬던 것처럼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그러니까 미를 소유할 수 있는 다양한 사물을 검토한다. 그는 보이고 들리는 것뿐만 아니라 지성이나 덕목에도 아름다움이 있다고 주장한다. 다만 플로티누스는 그간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아름다움은 균제한(비례에 의해 균형잡히고 가지런한) 상태다’라는 명제를 부정한다. 예를 들어 스토아 학파 파나이티오스와 같이 아름다움은 전체에 대해 부분들의 가시적인 배열과 비례에서 비롯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플로티누스는 이를 여러 논증으로 비판한다. 첫째로 이를 받아들이면 부분들을 지닌 복합물만 아름다운 것이 된다. 하지만 단색이나 기초 도형이 주는 아름다움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단일한 색채가 주는 여백의 미는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지만 그 안에 균제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플로티누스에 따르면 도덕적 행위도 아름다울 수 있는데 아름다움을 균제로 받아들이면 도덕적 행위 안에 부분들이 이루는 비례미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모순이 생긴다.

균제는 아름다움의 필요조건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질료에 미를 부여하는 원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형상 그 자체, 즉 일자다.

두덩이 돌이 나란히 놓여있다고 가정해 보자. 하나는 모양이 없고 전혀 예술로 손대지 않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가의 손으로 섬세하게 신이나 인간, 그레이스나 뮤즈 여신의 상으로 만들어져 있다. 인간상일 경우 어떤 개인의 초상이 아닌, 조각가가 모든 미를 결집한 조상이라고 하자.

이제 예술가의 손에 의해 형태의 미를 갖게 된 돌은 돌로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예술에 의해 도입된 형상 혹은 이데아의 관점에서 아름다운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 형상은 질료상의 것이 아니다. 그것이 돌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 설계자에게 있는 것이다. 그 고안자는 눈이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기술에의 참여에 의해 형상을 파악한다. 따라서 미는 기술상 매우 고도의 상태에서 존재한다.”

 

추한 것은 이성에 의한 형의 지배를 전혀 받지 않은 어떤 것, 즉 모든 점에서 철두철미하게 이데아 형상에 따르지 않은 질료다.”

 

앞서 제2 근본원리에 따라 형상은 인식할 수 있는 지성이자 인식될 수 있는 형상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대상과 추한 대상은 형상 그 자체에 의해 구분되므로 미는 그 대상의 이데아나 형상이 대상에 참여한 징표이자 결과로 볼 수 있다. 아름다운 형상은 예술품을 만드는 장인에 의해 포착된다. {“신적 예지와 예지적 우주의 미가 관조에로 현현될 수가 있다”(V, viii, 1; cf. VI, vii 42)}

 

 

영혼이 예전부터 알고 있어서 그렇게 이름짓고 또 알아보고서 그렇게 이름짓고 또 알아보고서 그것을 환영하고 그것과 일치하게 되는 어떤 것이다.
해석이란 영혼이 바로 그 본성의 진리에 의해 존재의 위계상 최고의 존재자와의 연고관계에 의해자신과 동족인 어떤 것, 또는 동족관계의 어떤 흔적을 볼 때 즉각적인 기쁨에 전율하고 스스로를 그 자체에 따르게 하고 그리하여 그 본성과 친근성 일체의 의미를 새롭게 일깨우는 것이다[I, vi, 2; p. 57].”

위 단락은 우리가 왜 미를 보고 쾌를 느끼는 것인지에 대해 서술한다. 미는 형상(이데아, 일자)이 결정한다. 아름다운 대상은 우리 영혼이 있었던 곳(유출된 곳) 다시 말해 일자에 가장 가까운 형태이기 때문에 아름답다. 이를 플로티누스는 이데아·형상이 사물에 들어간 상태라고 정의한다. 그래서 영혼은 자신이 친숙하게 여기는 일자와 가까운 아름다움을 보고 기쁨과 친근함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이 우리가 아름다움을 보고 쾌를 느끼는 이유라고 해석한다.

 

지금까지 플로티누스가 생각한, 아름다움을 결정하는 기준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전에는 균제한 상태가 곧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한 철학자들이 많았지만 플로티누스는 이 등식을 깬다. 그리고 형상과 아름다움의 직접적인 관계에 주목하여 형상이 아름다움을 결정하는 조건으로 정의한다. 다음 글에서는 이 관계에 대해 더 깊게 다뤄보면서 미의 조건으로서 균제가 아니라 통일성을 알아보고, 플로티누스가 생각한 감각적 아름다움과 정신적 아름다움의 차이에 대해서도 알아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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