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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사 연재] #10. 에피큐로스 학파와 회의주의 학파의 미학

미학사 연재

by AppyHending 2020. 7. 11.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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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즘 시대를 대표하는 학파로 스토아 학파와 자주 비교되는 에피큐로스 학파가 있다. 다수의 제자가 쾌락주의를 계승했으며, 대표적인 학자로 그리스어로 논문을 쓴 필로데모스Philodemus, 그리고 에피쿠로스 이론을 라틴어로 남긴 로마 시대 시인 루크레티우스Lucretius가 있다. 에피큐로스 학파는 행복을 철학의 목적이라 보았지만 우리가 아는 세속적 쾌락주의와는 거리가 있었다. 행복은 정신적 쾌락이자 지속가능한 가치여야했으며 이를 위해 도가처럼 여유와 소박한 생활을 강조했다.

지난 포스팅에서 봤던 것처럼 스토아 학파는 음악이나 시를 감상하는 것은 그 안의 질서와 정서가 반응하여 쾌락을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시 자체가 도덕적이고 교육적인 가치를 지닐 수 있었다. 시의 질서는 곧 스토아 학파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자연 질서와도 연관돼있고 시를 통해 기쁨을 느끼는 것은 그러한 질서와 조화를 이루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에피큐로스 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필로데무스는 『음악론Peri Mousikes』에서 음악이 정서를 불러일으키거나 성격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논박했다. 정서는 음악에 강하게 반응한다는 주장은 피타고라스부터 시작해서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 학파 그리고 헬레니즘 시대의 아카데미에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필로데무스는 다음과 같이 이 주장을 반박한다. 우선, 음악musike의 범위가 너무 넓다. 오늘날 우리가 순수음악이라 부르는 것뿐만 아니라 시와 무용까지도 그 당시에는 음악이라 불렸다. 이로 인해 음악 외적인 것들이 감정에 영향을 준 것인데 많은 학자들이 이를 소리의 영향으로 착각했다는 것이다. 필로데무스가 말한, 정서에 영향을 주는 요소는 음정이 아니라 다름 아닌 ‘가사’였다.

“음악가로서 그들은 쾌락을 제공한다. 그리고 시인으로서 그들은 가사를 썼으며 이러한 자격에서조차 사람들을 개선시키지 않았거나 여하튼 개선시켰다 하더라도 미미한 정도에 불과했을 것이다.”(Class Quart XXXII, 175)

“멜로디는 멜로디로서 비합리적alogon이어서 평정의 상태로부터 영혼을 분기시키거나 가라앉혀서 본래의 성격에 속하는 상태로 이끌어가는 것도 아니고, 영혼이 어떤 방향으로 분기되어 움직이고 있을 때 그것을 가라앉히거나 진정시키지도 않는다. ··· 왜냐하면 음악은 어떤 사람들이 즐겨 상상하듯이 모방 예술도 아니고 이 사람[셀레우시아의 디오게네스]이 말하듯이 모방적인 것이 아니고 장엄한 겸손·용기·비겁·질서·파괴 등 일체의 윤리적 특질을 표현하는 도덕적 감정과도 유사하지 않은, 요리술 이상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필로데무스의 추론은 소리는 사물이나 추상을 모방할 수 없으며 단지 다른 소리를 모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만약 같은 음정의 노래에 전혀 다른 가사가 들어간다면 사람들은 매우 상이하게 반응할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음악은 앞선 철학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감정을 정화하는 도덕적 가치가 없는 셈이다. 정서에 영향을 끼칠 수 없으니 좋은 음악을 들어서 도덕적이 되거나 나쁜 음악을 들어서 타락할 일이 없는 것이다.

회의주의 학파는 객관적 진리를 목표삼는 고통스런 철학적 사유를 체념하고 평정심과 태연자약의 이상을 실현했다. 기원후 2세기의 철학자, 섹스투스 엠피리큐스는 대표적인 회의주의 학자였다. 회의주의 학파는 예술 모방론에 대해도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모두 실체에서 보편자를 추론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회의주의 학파는 우리가 실체의 본성을 알 수 있다는 전제를 인정하지 않았다. 실체를 제대로 인식한다고 확신할 수도 없는데 어떻게 예술이 실체의 본성을 담은 모방물로서 가치가 있겠는가?

섹스투스는 『반교수론』 제 1권 「반문법학자론」에서 시가 진리를 담을 수 있는지, 음악이 에토스(성품)를 담을 수 있는지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어떤 것은 이런 종류이고 다른 것은 저런 종류인 것은 그것의 본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것을 그렇게 가정하는 것이다.”

“술과 같이 음악은 고통받는 사람을 미혹시키지만 그 음악이 끝나면 원상태로 되돌아간다.”

위와 같이 섹스투스는 음악은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할 뿐만 아니라 이전에 피타고라스 학파때부터 전개됐던 음악의 치료적 가치도 부정한다. 따라서 음악에 관한 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멜로디, 리듬 그리고 소리 조차도 실제로 존재한다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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