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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사 연재] #14. 플로티누스, 절대미와 감각미의 연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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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ppyHending 2020. 7. 18.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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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포스팅에서는 플로티누스의 선과 미의 관계에 대해 알아보았다. 플로티누스는 미를 결정하는 기준이 형상-이데아에 의한 통일성이며 이는 감각적인 아름다움과 정신적인 아름다움 모두에 적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로 인해 정신적 아름다움을 영혼이 조화를 이룬 상태, 즉 통일성을 띠는 상태로 규정하며 도덕성과 연결한다. 즉 미와 선은 거의 일치하게 된다.

플로티누스는 감각적 아름다움을 통해 정신적 아름다움이자 절대적 아름다움의 상태로 도달할 것을 주문했다. 그러한 상태는 영혼이 조화를 이루는 상태로 도덕성을 이루고 있는 상태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미와 선은 일치할 수 있게 된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플로티누스가 제시한, 형상의 미 즉 절대미로 나아가는 길을 알아볼 것이다. 플로티누스는 감각적 아름다움을 통해 그 배후에 있는 절대미를 추측할 수는 있지만 물질이 주는 아름다움의 경지를 넘어설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신적으로 도덕적이고 우수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신이 이러한 완벽한 작품이 되었음을 알 때, 저 내적 통일성을 파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으며 참된 인간을 고수하는 순수한 그대 자신의 본성에 전적으로 충실한 자아와 공간상 측정될 수 없는 저 유일의 참된 빛을 발견할 때, 그대 스스로가 이렇게까지 성장했음을 감지할 때 그대 자신이 바로 통찰력을 갖게 되는 것이며, 이제 확신을 갖고 이미 한 걸음 내딛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이제 안내자가 필요없다.

이것이 위대한 미를 보는 유일한 시각이다[pp.63~64]”

 

플로티누스는 우리가 모두 세계의 근원인 일자(the one)에서 유래한 존재라고 보았다. 아름다움 역시 일자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우리는 감각적 아름다움을 통해 일자를 유추할 수 있다. 그래서 플로티누스에게 감각적 아름다움은 절대적 아름다움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플로티누스에게 감각미는 절대미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다. 우리는 아름다운 물질을 보면서 흐릿하게나마 우리의 근원이었던 일자의 아름다움을 회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플라톤이 주장했던 상기설과도 굉장히 비슷한 내용이다.

 

물론 감각적 아름다움이 마냥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미는 사람을 분별없는 격렬함으로 이끌어 내 혼란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각적인 아름다움, 즉 가시적 세계의 아름다움은 비가시적 세계의 아름다움(절대미)로 인도할 수 있다. 감각적 아름다움의 긍정적인 역할을 극대화하려면 철학적 진리가 필요하다.

 

“(음악가의 감각적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이러한 성향은 그와 같은 사람에게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그는 이러한 형태들을 통해 표명되는 미에로 인도되어야 한다. 자신을 황홀하게 하는 것이 다름 아닌 예지계의 조화와 그 천체의 미임을 그는 가르침 받아야 한다. 알지는 못하지만 자신의 내부에 지니고 있는 바로 그것에 대한 믿음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에게 철학의 진리들을 심어주어야 한다.(I, iii, 1~2: p.37)”

 

이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가시적 세계의 미는 비가시적 세계의 미가 반영된 결과기 때문에 전자가 후자로 인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플로티누스는 자연의 미를 자주 찬양했다. 자연은 태초의 절대미를 반영한 결과기 때문이다.

 

플로티누스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자주 찬양했다. 자연은 일자에서 흘러나왔던 태초의 아름다움이 간직됐기 때문이다. 한편, 그러한 자연을 담은 예술 역시도 플로티누스에게 긍정적인 존재였다. 예술의 감각미는 절대미로 나아가는 단초를 제공함과 동시에 자연과 동등하게 일자로부터 형상을 나눠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자연을 예술에 담는 예술가가 자연에 담긴 일자의 형상을 포착할 충분한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로티누스는 예술가도 긍정적인 존재로 봄과 동시에 그들의 역량을 인정했다.

 

예술이 자연의 대상을 모방하여 창조한다 하여 무시당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로부터 이러한 자연 대상 그 자체가 모방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술이 보이는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재생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의 출처인 이성 원리에로의 복귀이며, 나아가서 그 대부분의 작업은 모두 고유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예술은 미의 담지자이며 자연에 결여되어 있는 것을 보완해 준다.”

 

마찬가지로 그는 예술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샀다. 자연과 예술 모두 형상을 균등하게 나눠 받은 것이지,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예술이 자연에 비해 열등하게 형상을 모방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예술가에게는 자연에 담긴 형상을 충분히 포착해낼 만큼의 능력과 자유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예술가의 능력을 인정한 것으로 신플라톤주의자로서 형상의 반영이란 예술의 역할을 강조하면서도 그 안에서 예술가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세우는 계기가 된다.

 

플로티누스 미학의 의의와 한계는 사다리에 비유해볼 수 있다. 감각적 아름다움이 절대적 아름다움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다리로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인정해 가시적 세계와 비가시적 세계의 간격을 좁힌 의의가 있다. 하지만 결국에 비가시적인 절대적 아름다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감각적인 측면을 모두 버려야 한다. 하늘에 오르기 위해 사다리를 탔지만 언젠가 그 사다리를 발로 걷어차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으로 감각적 아름다움과 절대적 아름다움 사이의 간극을 해결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고 단지 그 간격이 좁혀진 것에 불과할 것이다.

 

플로티누스는 플라톤에 비해 비가시적 세계의 아름다움과 가시적 세계의 아름다움 사이 거리감을 나름 좁혔다고도 볼 수 있다. 최소한 플로티누스는 감각적인 아름다움을 통해 이데아의 아름다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절대미에 연계되어 있는 존재다. 일자론에서 전개했던 것처럼 이 세계의 모든 존재자들은 근원으로서 하나의 일자에서 흘러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일자에 얼마나 가까우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영혼은 일자에 가장 가깝고 질료는 일자에서 가장 멀다) 일자를 미의 근원으로도 해석한다면 모든 존재자들은 모두 절대미와 연계되어 있는 셈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미학 이론도 명백한 한계를 지니는데 대표적으로 절대미와 감각미의 단절이 있다. 플라톤부터 논의됐지만 이데아의 아름다움은 정작 감각과 단절돼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아름다움이다. 그렇다면 그 아름다움은 무엇으로 정의되는가? 둘의 연관성을 어필해보았지만 결국 플로티누스도 감각적 아름다움과 절대적 아름다움 사이의 단절을 해결하지 못했다. 비어슬리는 이를 이 신비주의자는 자신의 사닥다리 꼭대기를 넘어 올라와서는 그 사닥다리를 차 버린다”라고 비유한다.(p92) 절대미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감각미를 사다리처럼 이용했지만 정작 절대미에 도달해서는 그 사다리를 차버려야 하는 상황을 비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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